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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편. 백제의 흥성과 신라의 음모 ①

 

제 1 장 부여성충의 뛰어난 전략과 백제의 영토 개척

 

부여 성충(扶餘成忠)이 계책을 건의함

부여 성충은 백제의 왕족으로, 어릴 적부터 뛰어난 지혜와 계략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아직 젊었을 때, 예(濊)의 군사가 백제를 침략하자 성충은 고향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 산성에 웅거하며 방어에 나섰다. 그는 항상 기묘한 전략으로 적을 물리쳐 많은 적병을 죽였고, 이에 예의 장수가 성충을 칭송하며 사자를 통해 궤 하나를 보냈다. 궤 안에는 약간의 음식이 담겨있다고 했으나, 성충은 이를 여는 것을 단호히 막고 불 속에 던져 넣게 했다. 궤 속엔 벌과 뱀 따위가 들어 있었다.

다음 날, 예의 장수는 또 다른 궤를 보내왔다. 이번에도 모두 불 속에 던지려 하자, 이번엔 성충이 열어 보도록 지시했다. 궤 안에는 화약과 염초 같은 폭발물이 들어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적은 다시 궤 하나를 보내왔고, 성충은 이를 톱으로 켜보게 했다. 그러자 안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칼을 품은 용사가 허리가 끊겨 죽은 채 발견되었다.

당시는 기원후 645년으로, 무왕(武王)이 세상을 떠난 뒤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하고 있었다. 의자왕은 성충의 기지를 높이 사며 그를 불러 물었다. "내가 덕이 부족하여 왕위에 걸맞지 못할까 두렵소. 신라는 백제와 풀 수 없는 큰 원한이 있는 적국이니, 백제가 신라를 멸하지 못하면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킬 것이오. 이는 내가 크게 걱정하는 바일세. 옛날 월왕 구천(句踐)이 범려(范蠡)를 얻어 10년간 힘을 기르고 10년간 백성을 교육하여 오월 정벌에 성공했으니, 그대가 범려처럼 나를 도와 백제를 구천처럼 번영시키지 않겠소?"

이에 성충은 답했다. "구천은 오왕 부차(夫差)가 교만해 월나라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23년 동안 힘을 기르고 교육하여 결국 오를 멸망시켰던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 백제는 사정이 다릅니다. 북쪽으로는 고구려, 남쪽으로는 신라의 위협 속에서 하루도 편한 날이 없고, 전쟁의 승패와 나라의 흥망은 순간과 아침저녁 사이에 갈립니다. 20년간 힘을 기르고 교육할 한가로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다행히 고구려는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야심을 품고 있어 조만간 내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로 인해 잠시 외부로 시선을 돌리지 못할 것이니 당장은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는 사정이 다릅니다. 원래는 작은 나라였던 신라는 진흥왕 이후 급속히 강대해졌으며, 우리 백제와 원한을 맺어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선왕(무왕)께서 용맹하셨기에 그들이 쉽게 움직이지 못했으나, 지금 선왕께서 돌아가신 상황에서 대왕을 경험 없는 소년이라 깔보고, 상사를 틈타 침략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이를 대비하여 반격할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왕이 질문했다. 신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한다면 어느 경로로 올 것 같소? 성충이 대답하길, 선대왕께서 성열성 서쪽의 가잠성과 그 동쪽 지역을 차지하셨으니 신라가 이 일을 억울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가잠성을 공격해올 것입니다.

그러면 가잠성의 수비를 강화해야 하지 않겠소? 왕이 다시 묻자, 성충이 답했다. 가잠성을 지키는 성주 계백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자로, 비록 신라가 전국의 병력을 동원한다 해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병법의 상책은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니, 신라 정예병이 가잠성을 공격해 온다면 우리는 이를 돕겠다 하면서도 다른 곳을 기습하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왕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어디를 치는 것이 좋겠소? 이에 성충은 말했다. 제가 듣기로 대야주의 도독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랑하는 딸 소랑의 남편으로, 권세를 믿고 부하와 군사, 백성을 학대하며 음탕과 사치를 일삼아 원한의 대상이 된 지 오래라고 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에 국상이 있다는 소문까지 더해진다면 수비가 더욱 소홀해질 것입니다. 게다가 신라 정예병이 가잠성을 포위할 경우, 대야성이 위급해지더라도 신라는 즉각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야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공격하면 신라는 전국적으로 혼란에 빠질 것이고, 이는 멸망으로 이어지기 쉬울 것입니다.

왕은 성충에게 말했다. 그대의 계책은 고금에도 드물게 뛰어난 것이오. 그리고 성충을 상좌평으로 임명하였다.


- 대야성(大耶城)의 함락과 김품석(金品釋)의 참사

이듬해 3월, 신라는 장군 김유신을 필두로 정병 3만 명을 이끌고 가잠성을 공격했다. 이에 백제의 계백은 성을 의지하며 임기응변으로 대응했고, 수개월간의 전투 끝에 신라 병사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7월이 되자 백제 의자왕은 가잠성을 구하기 위해 수만 명의 정병을 모으고 북쪽으로 진격하는 척하다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대야주로 돌려 미후성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다.

대야주는 신라 서쪽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으로, 그 관할 아래 40여 개의 성과 고을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춘추는 공주 소랑을 총애하여 그녀에게 대야주의 속현인 고타(현 거창)를 식읍으로 내려 고타소랑이라 불렀다. 또한, 소랑의 남편 김품석을 대야주 도독으로 임명해 40여 개의 성과 현을 다스리게 했으나, 품석은 음란하고 포악한 행실로 인해 신뢰를 잃었다. 그는 군사와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물과 여색에 탐닉해 부하들의 아내나 딸을 빼앗아 첩으로 삼는 등의 악행을 일삼았다.

그의 막장 중 한 명인 금일은 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긴 뒤 복수심에 차 있었다. 백제가 미후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 성 내부에서 돕겠다고 내통을 요청했다. 이에 의자왕은 부여윤충에게 정병 1만 명을 이끌고 대야성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백제군이 성 아래 도착하자 내부는 술렁이며 두려움에 빠졌고, 싸울 의욕도 상실했다. 품석 부부는 결국 서천으로 하여금 성에 올라가 윤충에게 자신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조건으로 성을 넘기겠다고 제안하게 했다.

윤충은 이 말을 듣고 측근들에게 의견을 물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라와 백성을 판 자를 결코 살려둘 수는 없소. 하지만 이들의 요청을 바로 거절하면 성 안에 웅거하며 오랫동안 저항할 수도 있으니 거짓으로 허락한 뒤 잡는 것이 낫겠소." 결국 그는 품석 부부의 안전한 귀환을 맹세로 약속하는 척하며 복병을 준비했다. 품석은 이를 믿고 부하 장사들을 먼저 성 밖으로 보냈으나, 이들은 모두 백제 복병에 의해 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금일에게 살해된 품석 부부를 넘어서 백제군은 성 내부로 진입했다.

의자왕은 미후성을 방문해 공을 세운 윤충에게 작위를 높여주는 동시에 말 20마리와 쌀 1천 섬을 하사했으며, 그 외 다른 장수들에게도 보상을 내렸다. 이후 각 장수들을 파견해 주변 고을들을 공략하도록 했다. 대야주는 본래 임나가라의 땅으로, 주민들이 신라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차에 백제군이 도착하자 크게 환영하며 한 달 만에 40여 개의 성과 현이 모두 백제의 손에 넘어갔다.

삼국사기에는 7월에 의자왕이 미후성 등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8월에 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해상잡록에서는 대야성을 함락한 뒤 40여 개 성이 항복했다고 적혀 있다. 후자의 기록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므로 여기서는 이를 따랐다. 대야(大耶)는 ‘하래’로 읽으며, 이는 낙동강 상류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유신전에는 대야를 ‘대량(大梁)’으로 기록했는데, 당시 ‘야(耶)’와 ‘양(梁)’은 모두 ‘라’ 또는 ‘래’로 발음되었다고 한다. 이후 신라 말기에 대야를 협천(陜川)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후대에는 이를 ‘합천’이라 읽게 되었다. 이는 당시 ‘합(陜)’의 첫소리인 ‘하’와 ‘내(川)’의 의미를 담은 ‘래’를 합쳐 ‘하래’로 읽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 고구려 · 백제 동맹의 성립

의자왕이 대야주 40여 성을 차지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의자왕이 성충에게 질문했다. “연개소문이 신하의 몸으로 임금을 죽였는데도 고구려 전역에서 그의 죄를 묻는 자가 없는 이유는 무엇이오?” 

성충이 대답했다. “고구려는 서국(당시 중국)을 상대로 수백 년 동안 싸움을 이어왔습니다. 초기에는 서국에게 여러 번 패배했으나, 근래 들어 고구려는 더욱 강성해졌습니다. 요동을 차지하고 그 영향력이 요서에까지 미치며, 육지와 해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력을 갖추었고, 특히 영양왕 시절에는 세 차례에 걸쳐 백만 대군을 보낸 수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위세를 떨쳤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구려 군사와 백성들은 서국과 맞서겠다는 기상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만, 영류왕(건무)은 도리어 이를 누르며 서국과 친선을 도모해 군사와 백성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연개소문은 오랜 세월 고구려 명문가로 이름난 집안 출신으로, 왕의 정책에 반대하며 당과 싸울 것을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백성들은 그의 주장을 지지했고, 결국 그는 영류왕을 죽였으니 고구려 전역에서는 연개소문을 처벌하기커녕 오히려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형국입니다.”

그러자 의자왕이 다시 물었다. “만약 고구려와 당이 전쟁을 벌이면 어느 나라가 승리하겠소?” 

성충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은 비록 영토가 고구려보다 넓고 백성도 많지만, 연개소문의 전략은 당 태종 이세민이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있으니 결국 승리는 고구려가 차지할 것입니다.”

의자왕은 또 질문했다. “하지만 이세민은 여러 영웅들을 격파하여 중국을 통일한 황제인데, 반면 연개소문은 큰 전투 경험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연개소문의 전략이 이세민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소?” 

이에 성충은 말했다. “과거 제가 고구려에 방문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는 아무 직위도 없고 단지 명문 가문의 귀공자였을 뿐이지만, 체격이 크고 의기가 넘치는 모습에서 제가 그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병법에 대해 논하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연개소문의 지혜와 계략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경우에서도 그렇습니다.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은 뒤 조용히 있다가 하루아침에 대신 이하 수백 명을 제거하고, 패수 전투에서 수의 군대를 꺾으며 위명을 떨친 영류왕마저 몰아내 나라를 장악했습니다. 이는 이세민조차도 따라올 수 없는 능력입니다.”

이에 의자왕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정말로 당나라를 멸망시키는 것도 가능하단 말이오?”

성충은 대답했다.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연개소문이 10년 전에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다면, 지금쯤 당나라를 멸망시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겨우 이제서야 대업을 달성했는데, 이세민은 이미 20년 전에 서쪽 나라를 통일하며 정교한 통치로 백성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아 왔습니다. 그러니 설령 연개소문이 군사적으로 승리한다고 해도, 민심이 곧바로 당나라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기 어려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연개소문이 고구려를 통일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하며, 내부에서는 여전히 왕실과 호족들의 잔존 세력이 그에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만약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무너뜨리기 전에 죽고 후계자가 탐탁지 못한 인물이라면,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두 나라의 운명은 예견하기 어렵습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우리 백제가 이제 대야주를 점령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지배권을 확립하지 못한 상황이네. 신라는 아직도 보복할 의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결국 고구려가 당을 멸망시키든,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든 남쪽으로 침략해 올 가능성이 높아 보여. 이럴 경우 북쪽에서는 고구려나 당의 침략을 받을 것이고, 동쪽에선 신라가 반발할 텐데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겠나?"

성충이 대답했다. "현 시점에서 보면 고구려가 당나라를 치지 않으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양쪽이 맞설 것입니다. 이것은 연개소문도 명확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고로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제와 신라 중 한 나라와 화친을 맺어 후방의 위협을 방지하려 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백제와 동맹을 맺는다면 신라는 적국이 되겠지만, 반대로 신라와 동맹을 맺는다면 백제가 적국이 될 것입니다. 이는 연개소문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당나라와 싸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쪽 두 나라가 서로 견제하며 고구려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선호할 것입니다. 지금 백제를 위한 최선의 계책은 빨리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백제는 신라를 상대하고, 고구려는 당나라를 상대하도록 역할을 분담할 수 있습니다. 백제에게는 신라가 큰 적수가 아니니, 틈을 타서 이익을 추구하는 편이 고구려보다 유리할 것입니다."

왕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였고, 성충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다. 

성충은 고구려에 도착한 후 연개소문과 교섭하며 서로 이해 관계를 조율하여 거의 동맹 체결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연개소문이 성충을 냉대하며 며칠 동안 만나주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낀 성충은 사정을 탐문해 보았고, 신라의 사신 김춘추(훗날 태종 무열왕)가 고구려를 방문해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을 저지하고, 대신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을 이루려고 활동 중임을 알게 되었다.

성충은 곧 연개소문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했다. "고구려가 당과 맞서 싸우지 않으려면 모르겠지만, 만약 싸움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백제와의 화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과거 서국(수나라)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마다 양식 운반의 어려움으로 인해 실패한 사례는 이미 분명합니다. 특히 수나라의 사례는 그 대표적인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번에 백제가 당과 연합한다면, 당은 육로를 통해 요동으로 직접 고구려를 침략하는 데 더해, 해상으로 병력을 이동해 백제로 진입하고 백제의 쌀을 이용하며 남쪽에서 고구려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는 남과 북 양쪽으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신라는 동해안을 끼고 있어서 당의 병력을 지원하기엔 백제만큼 유리하지 않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라는 과거 백제와 화친한 뒤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결국 백제를 배신하고 죽령 이남 고현 안쪽의 10군을 함부로 점령한 전력이 있습니다. 이는 공께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신라가 오늘 고구려와 동맹을 맺는다 하더라도, 내일 당과 손잡고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으려 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연개소문은 이 글을 읽은 후 김춘추를 가두고 죽령 밖 욱리하 일대의 땅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결국 성충은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귀환하게 되었다.


- 안시성 전투 때의 성충(成忠)의 건의

서기 644년, 신라는 장군 김유신을 보내 죽령을 넘어 성열과 동대 등 여러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백제의 의자왕은 신하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신하 성충은 이렇게 조언했다. 신라가 여러 번 패배한 끝에 자국의 보전을 우선하지 않고 돌연히 침략을 시도함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듣기로는 김춘추가 딸 고타랑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당에 몰래 여러 차례 건너가 구원병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또한 당 태종 이세민은 이미 오랫동안 해동을 침략할 뜻을 품고 있었기에,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모두 겨냥한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내 생각에는 당나라는 고구려를 치면서 수군을 이용해 백제의 서쪽에 침입할 것이고, 동시에 신라는 고구려 후방을 교란하면서 백제가 고구려를 돕지 못하도록 만들 계획입니다. 하지만 신라가 성열과 동대 등을 차지하기 전에는 고구려 후방 교란이 어려울 것이고, 당 또한 요동을 점령하기 전까지는 식량 운송에 매달려 백제를 공격할 병선을 보낼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백제는 당분간 성열 등의 성을 신라에 내어주고, 군사를 정비하며 기다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당과 신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각축전을 벌이며 서로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라는 백제를 두려워하여 충분히 전력을 쏟지 못할 것이나, 당은 모든 국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 틈을 타서 백제가 수만 명의 정예 병력을 배로 강남(江南) 지역으로 보내면, 그 지역은 손쉽게 점령될 것입니다. 강남을 차지한 뒤, 그곳의 자원과 인력을 활용하여 공략한다면 고구려가 서쪽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남쪽은 백제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라가 아무리 백제를 원망한다 해도 작은 나라에 불과한 그들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신라는 결국 백제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 그때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신라를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멸망시키고 싶다면 그렇게 하고, 그대로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여 문제를 일으킬 여지를 없앨 수 있습니다.

의자왕은 성충의 의견에 동의하며 변경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듬해 당은 과연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쳐들어가 안시성을 포위했지만, 몇 달 동안 승부를 내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신라 또한 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남쪽 지역을 공격하며 후방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에 의자왕은 장군 계백에게 명령하여 신라 후방을 기습하고 성열 등 7개 성을 되찾게 했다. 이어 윤충에게 부사달(현재의 송도)을 포함한 10여 개 성을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또 수군을 동원해 당의 강남 지역을 습격하면서 월주(현재의 사오 조 지역) 등을 점령하고, 본격적으로 해외 영토 확장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자의 참소로 성충이 왕의 냉대를 받아 뜻을 펼치지 못했고, 이후 상황은 점점 어긋났다.


제 2 장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음모

 

- 김춘추의 복수(復讐) 운동

김춘추는 신라의 내성 관료 김용춘의 아들이며, 김용춘은 백제의 무왕과 인연이 있던 인물이다. 김용춘이 세상을 떠난 후, 김춘추는 그의 관직을 계승하며 신라의 정치적 중심 역할을 맡았다. 그는 백제의 무왕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으며, 이후 무왕이 사망하고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더욱 긴박해졌다. 의자왕은 성충의 계책을 통해 대야주를 공격,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그의 아내를 죽이고 관내 40여 개 성을 점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는 기둥에 몸을 기대며 멍하니 앞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기둥을 내리치며 결단을 내렸다. "사나이로 태어나 복수를 하지 못한다니 말이 되는가!"라고 외치며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신라는 영토와 병력이 부족한 작은 나라였다. 김춘추는 오로지 외국의 힘을 빌려야만 백제에 맞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에 그는 고구려로 향했다. 당시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친 경험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거인이었으므로 그와 손을 잡으면 백제를 향한 복수를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는 신라와 고구려 간 동맹의 이로움을 설명하며 연개소문과 동맹을 거의 성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백제의 신하인 상좌평 성충이 이를 알아차리고 연개소문에게 서신을 보내 상황을 반전시켰다. 결국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잡아 가두고 욱리하 일대의 영토를 요구하며 압박했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 왕의 총신 선도해에게 선물을 보내며 자신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강력한 권세 아래 선도해가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도해는 선물을 받고 마음이 움직여 김춘추에게 직접적인 도움 대신 살아남을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며 당시 고구려에서 유행하던 이야기가 담긴 책 *거북과 토끼 이야기*를 건넸다.

김춘추가 그 책을 읽어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토끼는 거북의 꾐에 속아 등에 업혀 용왕국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높은 벼슬을 주겠다는 약속에 끌려 갔지만, 실제 이유는 병든 용왕이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아챈 토끼는 재빨리 꾀를 내어 용왕에게 말했다. "저는 달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존재로, 선보름에는 간을 꺼내 놓고 후보름에는 다시 간을 넣습니다. 제가 이곳에 왔을 때는 선보름이라 간이 제 몸에 있지 않습니다. 현재 그 간은 금강산의 나무 밑에 숨겨져 있습니다. 저를 돌려보내준다면 그 간을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속여 다시 거북의 등에 업혀 나왔고, 물가에 도착하자 "사람이나 짐승이나 간을 꺼냈다 다시 넣는 법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며 도망쳤다.

김춘추는 이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얻고, 자신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지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김춘추는 선도해의 계획을 파악한 뒤 고구려 왕에게 거짓 문서를 올려 욱리하 일대의 땅을 고구려에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이 약속을 믿고 김춘추와 협정을 맺은 후 그를 석방해 귀국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김춘추는 국경에 도달하자 고구려 사자를 돌아보며 "그 땅이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냐? 어제의 맹세는 단지 죽음을 피하기 위한 속임수였을 뿐이다"라며 유유히 도망쳐 돌아갔다.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협상에 실패하고 돌아오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철저히 고립된 약소국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결국, 부득이하게 해서 지역을 통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는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김춘추는 직접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가 당태종을 만났으며, 신라의 위급한 처지를 호소하며 자신을 낮추고 풍성한 예물을 바쳐 구원병을 요청했다. 그는 당나라 조정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들 법민(훗날의 문무왕)과 인문 등을 인질로 보냈고, 신라 고유의 의복과 관복을 버리고 당나라식 복장을 따랐다. 더 나아가, 진흥왕 시절부터 사용해 온 신라의 제후 칭호와 연호를 포기하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데 동의했다.

또한, 당태종이 편찬한 진서와 그가 수정·보완한 사기, 한서, 삼국지 등에서 조선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신라 내부에 퍼뜨렸다. 이를 통해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을 확산시키며 국가 내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 김유신의 등용 

김춘추가 복수 운동에 바쁜 시기를 보내던 때, 그의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김유신이었다. 당시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대표 인물, 부여성충이 백제의 대표 인물로 꼽힌다면, 김유신은 신라를 대표하는 인물로 칭해질 만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의 역사 기록자들은 두 나라 주요 인물들의 전기 자료를 거의 모두 삭제하고 오직 김유신만을 찬양하며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 결과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김유신 한 사람의 전기 분량이 을지문덕을 비롯한 수많은 다른 인물들의 전기를 압도했으며, 부여성충 같은 인물은 아예 기록에 포함되지 못했다. 따라서 김유신전에는 화려하고 찬란한 내용이 많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여기서는 그중 사실과 부합하는 내용만 간추려 보겠다.

김유신은 신가라 왕 구해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여섯 가라국 중 대부분이 신라와 전쟁을 치르다 멸망했지만, 신가라는 신라와 싸우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라를 바치며 귀부했다. 신라는 골품 제도가 엄격한 사회였기에 구해는 식읍을 받으며 준귀족 대우를 받았다. 그는 장군으로서 구천 전투에서 백제왕을 처단하는 공적도 세웠다. 그러나 신라의 귀족들은 김구해를 외래 출신인 김씨로 여기며 기존 김씨 가문들과 다르다고 여겼고, 그의 가문이 다른 세 성 김씨와 혼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구해의 아들 김서현은 어느 날 여행 중 세 성 김씨 가문의 한 사람이자 숙흘종의 딸인 만명을 만나 그녀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겼다. 결국 두 사람은 몰래 사랑을 나누고 김유신을 잉태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숙흘종은 크게 분노하며 만명을 가두었으나, 만명은 그의 손을 벗어나 서현이 머물던 지금의 진천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고, 이후 김유신이 태어났다. 그러나 서현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만명은 홀로 유신을 키웠다.

김유신은 어려서 방탕하게 행동하곤 했으나, 어머니의 눈물 어린 훈계를 듣고 깊이 반성하며 학문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17세의 나이에 화랑에 들어가며 중악산과 인박산 등에 올라 나라를 구하려는 기도를 올리고 검술을 연마한 끝에 점차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하지만 가라국 출신의 김씨라는 배경 탓에 특별한 인맥이 없으면 중요한 역할을 맡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던 그는, 당시 실권자였던 내성사신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와 친분을 쌓으며 장래를 준비하려고 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김유신의 집 근처에서 제기를 차다가 유신이 일부러 춘추의 옷 단추를 떨어뜨렸다. 이를 핑계 삼아 춘추를 집으로 초대한 유신은 막내 누이인 문희를 불러 단추를 꿰매게 했다. 문희는 얇은 화장과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섰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춘추는 단숨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결국 춘추는 혼인을 요청해 김유신의 매부가 되었다.

용춘이 사망하고 춘추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유신은 그의 뛰어난 군사 재능뿐만 아니라 춘추의 지원을 받아 신라의 각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유신은 소부한이라는 벼슬을 받아 장군이자 재상의 역할을 겸하며 신라의 병력과 군사를 사실상 한 손에 장악하게 되었다.


- 거짓이 많은 김유신의 전공(戰功)

삼국사기 김유신전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은 전략과 전술 면에서 탁월하여 일백 싸움에서 모두 승리한 명장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업적 중에는 패배를 감춘 채 작은 승리를 과장하여 기록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진덕여왕 원년(기원후 647년), 백제 군사가 무산, 감물, 동잠 세 성을 공격하자 김유신은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이에 맞섰다. 하지만 백제군의 수세에 밀려 고전하며 힘이 다하게 되었다. 이에 김유신은 비녕자에게 “오늘 상황이 급박하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사람들의 사기를 올릴 수 있겠는가?”라며 독려했다. 비녕자는 두 번 절을 올린 뒤 이를 수락하고 적진에 돌진하며, 그의 아들 거진과 종 합절도 그 뒤를 따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세 사람의 장렬한 결사에 감동한 신라 삼군은 앞다투어 진격했고, 결국 적군을 대파하여 3천여 명의 적 병사를 목 베었다.

이후 김유신은 압량주의 군주로 임명된 후, 대야성 전투의 복수를 위해 출병을 준비했다. 왕이 적은 병력으로 큰 군사를 상대하는 것의 위험성을 우려하자 김유신은 “우리는 이미 한마음이 되었으니 더는 백제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설득해 출병 허락을 얻었다. 김유신은 고을의 병력을 훈련시켜 대야성 밖까지 이르렀고, 백제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는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옥문곡으로 물러났고, 이를 가볍게 여긴 백제군이 방심하며 추격하자 복병을 내어 앞뒤로 포위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백제 장군 8명을 생포하고 적군 1천여 명을 무찔렀다.

그 후 김유신은 사신을 보내 백제 장군에게 “우리 군주 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의 유골이 너희 손에 있으니 이를 돌려보낸다면 너희 포로들을 석방하겠다”라고 전했다. 결국 백제 측이 품석 부부의 유골을 보내오자 약속대로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김유신은 이어진 전투에서도 승리를 이어가며 백제 경계를 넘어 악성 등 12성을 점령하고 1만 명을 베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는 이찬에 오르고 상주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에도 진례 등 9성을 함락하여 9천여 명을 죽이고 600여 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기원후 648년 8월, 백제의 장군 은상이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자 신라 왕은 김유신, 죽지, 진춘, 천존 등의 장군에게 삼군을 다섯 부대로 나누어 백제를 치도록 명령했다. 양측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열흘간 접전이 계속되었고, 전장은 시체로 가득하고 흘러내린 피가 강물을 이룰 정도였다. 

김유신은 도살성 아래에 진을 치고 말을 쉬게 하며 다시 공격할 방안을 계획하던 중 물새 한 무리가 동쪽에서 날아와 군막 위를 지나갔다. 이를 본 병사들은 불길한 징조라고 두려워했으나, 김유신은 "오늘 백제의 정탐병이 올 것이니 모르는 척하라"고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명을 내렸다. "수비를 굳게 해 움직이지 말고, 내일 구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백제의 정탐병이 이 소식을 은상에게 전했고, 이를 들은 은상은 구원군이 오는 줄 알고 경계심과 두려움에 빠졌다.

김유신은 이때를 틈타 병사들을 이끌고 맹렬히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로 달솔과 정중을 비롯한 백제 병사 100명을 생포했으며, 좌평 은상과 자견 등 10명을 포함해 총 8,980명을 전사시켰다. 또한 말 1만 마리와 갑옷 1,800벌을 비롯한 많은 장비를 노획했다. 귀환하던 길목에서도 좌평 정복이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와 항복했으며, 신라는 그들을 살려 보내줬다.

본기의 기록 역시 유사하며, 석토와 악성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악성은 진례 인근, 현재의 전라도 동북부 지역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도살성은 청안으로 추정되며, 석토 역시 그 인근 지역으로 보아 충청도 동북부를 신라가 점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신이 늘 승리를 거뒀다고 보기엔 기록상의 모순도 있다. 당서에 따르면 신라 사신 김법민이 도움을 요청하며 “중요한 성과 요충지가 백제에게 넘어가 국토가 점점 줄고 있습니다. 옛 땅만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강화(講和)를 청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태종대왕이 백제를 정벌하려 당나라 군사를 요청했으며 혼자 앉아 깊이 걱정하는 모습이 얼굴에 드러났다”며 당시 신라의 위기감을 보여준다.

당시 백제는 성충, 윤충, 계백, 의직 같은 명재상과 용맹한 장군들이 버티고 있었으며, 병사들 역시 오랜 전쟁을 겪으며 강력한 내구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가 백제의 적수로 단정을 짓기 어려웠다. 김유신이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성과를 올렸을 가능성은 있지만, 기록만큼 대단한 공적을 남기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김유신 특유의 음모

앞에서 언급한 대로 김유신의 공적이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가 어떻게 그토록 명성을 얻었을까? 김유신은 지혜롭고 용기 있는 명장이 아니라 음험하고 강압적인 정치가였으며, 그의 업적은 전쟁터에서가 아니라 음모와 계략으로 이웃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 데 있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신라 부산현(지금의 송도 부근)의 현령 조미곤은 백제에 포로로 잡혀 백제 좌평 임자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는 충실하게 임자를 섬기면서 자유롭게 밖을 드나들 기회를 얻었고, 결국 신라로 도망쳐 돌아와 백제 내부 사정을 보고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유신은 조미곤에게 말했다. “임자는 백제 왕이 특별히 총애하는 대신이라니, 내 뜻을 전달해 신라에 이롭게 한다면 당신의 공로가 누구보다 클 것이오. 위험을 감수하고 내 말을 따를 수 있겠소?” 이에 조미곤은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명령을 따르겠다고 답했다.

조미곤은 김유신의 밀명을 받고 다시 백제로 갔다. 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백성으로서 이 나라의 풍속을 모르고 지내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정중히 말씀드리지 못한 채 나간 적이 있습니다만, 돌아왔습니다.” 임자는 그의 말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조미곤은 틈을 타 임자에게 고백했다. “사실은 고향이 그리워 신라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김유신을 만나 그의 뜻을 들었습니다. 유신은 두 나라가 원수로 지내며 전쟁이 끊이지 않으니 결국 한 나라는 멸망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지금의 부귀를 잃고 포로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두 나라 중 어느 쪽이 멸망하더라도 우리 둘이 함께 부귀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금 약속을 맺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가 망하면 제가 공의 지원으로 백제에서 벼슬을 하겠으며, 반대로 백제가 망하면 공이 유신의 도움으로 신라에서 관직을 얻는 방식입니다.”

임자는 즉각 답을 하지 않고 잠잠했지만 며칠 뒤 조미곤을 불러 그 말을 다시 확인했다. 조미곤은 김유신의 말을 반복하며 덧붙였다. “나라는 꽃과 같고 인생은 나비와 같다고 합니다. 만약 한 꽃이 지고 다른 꽃이 핀다면, 나비는 꽃을 옮겨다니며 늘 봄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굳이 헛된 절개를 지키며 부귀를 버리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임자는 본래 권력과 부귀에 집착하던 사람이었기에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조미곤을 통해 김유신의 제안을 수락했다.

김유신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임자에게 “한 나라의 권세를 독점하지 못한다면 누리는 부귀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듣기로는 백제에서는 성충이 왕의 총애를 받아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만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공께서는 겨우 그 밑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라는 교묘한 말로 성충을 모함하도록 꾀었다. 결국 임자는 김유신의 계책대로 행동했고, 왕궁에 교묘히 침투한 요망한 여인 금화를 통해 성충을 비롯한 유능한 백제 신하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는 결국 백제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3장 부여성충의 자살

 

- 금화(錦花)와 임자(任子)의 참소와 이간질

김유신이 보낸 무속인 금화는 미래의 복과 국가 운명의 길고 짧음을 미리 아는 선녀라 선전되며 의자왕에게 추천되었다. 왕은 이에 속아 금화에게 백제의 앞날과 운명에 대해 물었다. 금화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마치 신의 계시를 전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만약 충신 형제를 죽이지 않으면 곧 백제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이고, 반대로 그들을 없애면 천년만년 백제의 국운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에 왕이 반문했다. “충신을 섬기면 나라가 흥하고, 충신을 죽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건 고금의 이치인데, 충신을 죽여야 국운이 이어진다니 무슨 말이오?” 금화가 대답했다. “비록 그들이 충신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그 충신 형제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금화는 답하기를, “저는 신의 비밀한 명령을 전할 뿐이며, 그 인물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 말에 왕은 성충과 윤충 형제를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이름에 모두 ‘충(忠)’ 자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임자는 왕이 이미 성충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성충을 모함하여 그를 내쫓을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왕과 임자가 술자리를 함께하던 중 왕이 물었다. “성충은 어떤 사람이오?” 임자는 이렇게 답했다. “성충은 그 재주와 책략이 또래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며, 전쟁의 승패를 미리 가늠하여 실수하는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또한 남의 뜻을 잘 헤아리고, 말솜씨도 훌륭하여 사신으로 이웃나라에 가도 왕의 체면을 잃지 않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능만큼 다루기가 매우 어려운 사람입니다.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성충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개소문과 친밀해져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구려에는 공이 있고 백제에는 내가 있으니 우리 둘이 힘을 합하면 얻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소?’ 라며 스스로 백제의 개소문임을 자처했답니다. 그리고 개소문도 성충을 향해 ‘나와 공이 아직 대권을 잡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극진히 대접했다고 하니, 이는 마음속에 불온한 뜻이 있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성충은 이웃 나라의 권세 있는 신하와 지나치게 친밀하고 그의 동생 윤충 같은 걸출한 장군까지 곁에 있으니, 대왕께서 천수를 누린 뒤 백제는 대왕의 후손들이 아닌 성충의 나라가 될 것이라 우려됩니다.” 

임자의 이 말에 의자왕은 윤충을 파면하고 소환하였으며 성충도 홀대하기 시작했다. 당시 윤충은 월주에서 병력을 훈련하며 당의 강남 지역을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참소로 인해 파면되어 돌아와야 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월주는 당나라에 함락되었다. 이 사건으로 윤충은 분노와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성충(成忠)의 자살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의 축출

윤충이 죽고 나서 성충마저 제거되자, 금화는 더욱 거리낌 없이 의자왕을 설득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왕흥사와 태자궁을 지었다. 이는 나라의 재정을 거의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어 백제의 산천 지덕이 험악하다 하여 이를 철로 눌러야 한다며 각 지역의 명산에 쇠기둥이나 쇠못을 박고, 강과 바다에는 철로 만든 그릇을 던졌다. 이로 인해 나라 안의 철이 동이 나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금화를 원망해 '불가살'이라 불렀다. '불가살'은 백제 신화에서 쇠를 먹는 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성충은 상소를 통해 임자와 금화의 죄를 신랄히 논했지만, 왕 주변의 신하들 대부분이 임자와 금화의 측근이었기에 성충을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성충이 "대왕의 총애를 잃은 후 억울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이런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라고 참소했다. 이에 왕은 성충을 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를 고마미지로 귀양 보내며, 서부은솔 복신마저 파면하고 옥에 가뒀다. 이들은 모두 성충과 뜻을 함께했던 인물들이었다.

옥중에 갇힌 성충은 다시 유언의 상소를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천시와 인사를 살펴보건대 머지않아 전란이 닥칠 것입니다. 군사를 동원할 때는 지형을 선택해야 하며, 높은 곳에 위치해 적을 상대해야만 만전합니다. 만일 적군이 침입한다면 육로는 탄현에서 막고, 수로는 백강에서 방어하며 험한 지형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간언한 후 음식조차 끊고 28일 만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는 고구려 태대대로 연개소문이 죽기 1년 전의 일이었다.

현대에 탄현은 여산 탄현으로, 백강은 부여 백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백제 멸망 당시 신라의 군사가 탄현을 넘어오고, 당 군사들이 백강을 지나갔으며 이후 계백은 황산에서, 의직은 부여 성전 앞에서 전투를 치렀다. 따라서 탄현은 현 보은의 탄현으로, 백강은 지금의 서천 백마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어귀인 흥수가 언급한 기벌포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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